프로그래머의 편지
무주산골영화제는 매년 ‘판’ 섹션을 통해, 해외에서 주목받았는데 한국에서 상영된 적이 없는 영화나 국내 영화제 상영작 중 다시 볼 만한 영화들 몇 편을 엄선하여 상영해왔다. 올해에는 해외극영화 중 3편이 - 독일영화 <피닉스>, 일본 영화
<유레카>, 노르웨이 영화 <오슬로, 8월 31일>- 이에 해당하는 영화다. 정말 보석 같은 영화들이다. 무주에서 상영을 놓치면 극장에서 다시 볼 때까지는 얼마나 시간이 필요할지 모르겠다. 그러므로 시간이 된다면 꼭 챙겨보길 권한다.
[1] <피닉스 Phoenix> dir_크리스티안 펫졸드, 독일, 폴란드, 2014, 98’
<피닉스>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아 성형수술을 하고 돌아온 아내와, 아내를 알아보지 못한 채 아내를 닮은 아내를 이용해 아내의 재산을 가로채려는 남편의 이야기를 긴장감 넘치게 담아내고 있다. 故 하룬 파로키 감독과 함께 심리 스릴러 장르를 활용하여 정교하게 직조한 이야기는 감독의 안정된 연출력과 니나 호스의 뛰어난 연기를 통해 국가의 이익을 위해 홀로코스트를 이용했던 독일의 국가주의를 정조준한다.
‘불필요한 단 한 개의 씬도 낭비한 단 한 개의 쇼트도 찾을 수 없는 영화’라는 평가가 그리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 영화로, 2014년 최고의 영화를 언급할 때 빠지지 않는 수작이지만 의외로 많이 알려지지 않은 숨은 보석과도 같은 작품이다. 국내에서는 이상하게도 단 한번도 상영되지 않다가 올해 초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사사로운 영화리스트 상영전을 하며 첫 상영되었다.
평론가들이 호평을 했으니 재미없는 영화일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. 이런 생각이 맞을 때도 많지만, 적어도 이 영화에는 해당되지 않을 것이다. 이 영화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분들은 영문이긴 하지만 필름코멘트에 실린 크리스티안 펫졸트 감독의 인터뷰를 읽어보기를 권한다.
[2] <유레카 Eureka> dir_아오야마 신지, 일본, 2000, 217'
06.05(일) 10:30 | 산골영화관 태권관
작년 여름, 전북독립영화협회가 기획, 진행했던 ‘아시아 영화 특별전’에서 몇 명의 일본 감독에 대한 강의를 하게 되었다. 그 중에 한 명이 아오야마 신지 감독이었다. 강의를 준비하면서 아오야마 신지 감독의 <유레카>를 다시 보았다. 한국에서 꼭 다시 소개되어야 하는 영화라고 생각했다. 지금은 좀처럼 이름을 들을 수 없지만 아오야마 신지는 1990년대와 2000년대를 대표하는 일본영화의 대표 감독 중 한 명이다. 그의 필모그래피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그의 데뷔작 <헬프리스>(1996)를 시작으로 <유레카>(2000)를 거쳐 <새드 베케이션>(2007)으로 완결된 <기타규수 삼부작>이다. <기타큐슈 삼부작>이라고 불리는 것은 이 세 영화의 배경이 되는 장소가 감독의 고향이기도 한 일본 후쿠오카현의 기타큐슈이기 때문이다.
이 삼부작 중 <유레카>를 상영하기로 마음먹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. 영화가 길었기 때문이다. 217분. 예전엔 7시간짜리 영화를 상영해도 별 고민이 없었지만 무주는 달랐다. 그러나 올해 반드시 이 영화를 상영하고 싶었다. 그렇게 한 달을 고민하고 결정을 내렸다. 상영 허락을 받기 위해 접촉을 시작했다. 원래 해외배급을 총괄했던 유럽배급사는 계약기간이 끝났다고 했지만 일본의 어떤 회사와 접촉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았다. 일본 배급사를 수소문하는데 한 달이 걸렸다. 간신히 연락한 회사는 다시 그 유럽 배급사에 연락하라고 했다. 이것들이.. 확! 이렇게 생각만 했다. 그렇게 <유레카>의 상영 허락을 받아내는데 석달이 걸렸다. 상영에 관한 모든 문제를 정리한 날, 문득 <유레카>에서 긴 여행을 떠난 세 인물이 떠올랐다.
<유레카>는 일본의 옴진리교 사건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영화다. 어느 시골에서 발생한 버스 총기 인질 사건에서 살아남은 버스 운전사와 어린 남매의 이야기다. 끔찍한 사건에서 간신히 살아남아 평생 안고 살아가야할 트라우마를 갖게 된 세 사람, 영화는 이 세 사람이 “살아난 것이 내 잘못인가?”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을 217분이라는 긴 시간에 걸쳐 담아내고 있다. 이 영화를 본다는 건 단순히 긴 시간의 영화 한편을 보는게 아니라, 영화 속 인물들의 여정에 동참하는 일종의 동행같은 일일이지도 모르겠다.
[3] <오슬로, 8월 31일 Oslo, 31. August> dir_요아킴 트리에, 노르웨이, 2011, 95'
06.04(토) 11:00 | 예체문화관 대공연장
‘요아킴 트리에’라는 생소한 노르웨이 감독의 이름을 기억해 두기로 한 건 대니 보일 감독의 <트레인스포팅> 연상시킨다는 평가를 받았던 그의 데뷔작 <리프라이즈 Reprize>(2006) 때문이었다. 그러나 두 번째 장편영화 <오슬로, 8월 31일>는 그의 감각적인 데뷔작과는 전혀 다른 영화였다. 이미 1회 무주산골영화제를 준비할 때부터 마음에 두고 있던 영화였는데, 이 영화의 리듬과 호흡을 볼 때, 무주에서 처음부터 이 영화를 선보일 자신이 없었다. 그래서 올해도 좀 망설였다.
그런데, 넘치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해 벌어지는 수없이 많은 사건사고들, 흙수저, 금수저로 구분되는 삶 속에서 미래보다 현재만을 바라봐야 하는 수많은 사람들, 자기검열을 하지 않고서는 어떤 속깊은 이야기도 편안하게 하기 어려운 사회 분위기. 1년에 1만 4천여명이 자살하는 OECD 국가 중 자살율 1위의 나라. 4. 16 이후 점점 심해지고 있는 한국사회의 암울한 분위기를 피부로 느끼면서 올해 이 영화를 상영하고 싶은 마음이 점점 강해졌다. 결국 그렇게 이 영화를 올해 무주에서 선보이게 되었다.
마약중독자인 30대 주인공이 재활과정을 마치고, 구직 면접과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도시로 돌아와 겪는 하루 동안의 이야기인 <오슬로, 8월 31일>은 상실감 때문에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알지 못하는 주인공의 존재론적 위기감을 영화에 담아내고 있다. 상실감, 특히 상실감을 동반한 고독감. 이것이 이 영화가 담아내고자 하는 정서이고 이 영화는 이것을 완벽하게 담아내고 있다. 이미 프랑스 누벨바그를 대표하는 거장 루이 말에 의해 1963년에 동명의 제목으로 영화화된 적이 있는 전후 불안 시대를 대표하는 프랑스 작가 피에르 드리외 라 로셀의 소설 <도깨비불>에서 영감을 얻은 이 영화는 2011년 스톡홀름영화제에서 작품상과 촬영상을 수상하면서 ‘완벽하게 그려진 한 세대의 초상’이라는 평가를 받은 바 았다.
즐거운 영화를 기대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영화를 볼 것을 권한다. 그러나 우울이라는 감정에 시달려본 관객이라면 이 영화가 담아낸 감정의 실체가, 영화 속 주인공이 경험하고 있는 고립감과 상실감이,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다가올 것이라 생각한다.